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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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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는 18세기 독일의 작가, 문학 이론가, 극작가로, 독일 문학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프랑스 고전주의를 옹호하고, 독일어의 표준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저서 『비판적 시학의 시도』는 독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엄격한 규칙과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연극 개혁에도 힘썼으며, 아내 루이제 고트셰트와 함께 독일 연극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해 영향력이 감소했으며,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과의 비교를 통해 그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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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
원어 이름Johann Christoph Gottsched
출생일1700년 2월 2일
출생지유디텐, 브란덴부르크 변경국
사망일1766년 12월 12일
사망지라이프치히, 작센 선제후국
학력
모교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영향
학파
주요 관심사
주요 사상

2. 생애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크리스티안 볼프의 제자가 되었다.

마르틴 오피츠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학의 출발점에 섰다고 평가받지만, 명예욕이 강하고 교육자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1730년에 모교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가 되었고, 1734년부터 문학과 철학을 강의하며 문예 일반, 특히 연극(극단) 개혁, 독일어 개량에 힘썼다. 한때 문단의 대본산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루이제 아델군데 빅토리아 고트셰트(결혼 전 성씨 쿨무스)의 초상화. 엘리아스 고틀롭 하우스만이 1750년경에 그린 유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크리스티안 볼프의 계보를 잇는 프랑스의 합리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당시 바로크풍의 왜곡되고 과장된 경향에 맞서 독일 연극, 문학, 언어의 혁신을 추구했다. 고트셰트는 "문학의 혁신은 전 독일의 공동의 영예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독일 문학은 무시해도 될 만한 전통밖에 없었기에 프랑스의 피에르 코르네유장 라신, 그리고 시학에서는 니콜라 부아로데프레오를 '좋은 취향'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극장이 정통 루터파에게는 악마의 설교단이나 다름없던 시대에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의 지위와 공연 내용 향상, 더 나아가 현대 표준어의 순화와 보급에 공헌했다.

1727년부터 1740년경까지 명성이 매우 높았지만, 취리히 대학교 교수이자 영국의 존 밀턴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요한 야코프 보트머와 브라이팅거와의 논쟁 이후, 고트셰트의 이름은 학문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가 되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크리스티안 볼프의 제자가 되었다.[4] 1723년 마기스터 학위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군대 징집을 피해 라이프치히로 도망쳤다.[4]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부르크하르트 멘케의 보호를 받았는데, 멘케는 "필란더 폰 데어 린데"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라이프치히의 ''Deutschübende poetische Gesellschaft'' 회장이었다.[4] 고트셰트는 1726년 이 학회에서 "선임"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Deutsche Gesellschaft''라는 이름으로 학회를 재편성했다.[4] 1730년에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가 되었다.

2. 2. 라이프치히 시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1723년 마기스터 학위를 받았으나, 프로이센 군대 징집을 피해 라이프치히로 도망쳤다. 라이프치히에서 요한 부르크하르트 멘케의 보호를 받았는데, 멘케는 "필란더 폰 데어 린데"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라이프치히의 ''Deutschübende poetische Gesellschaft'' 회장이었다. 고트셰트는 이 학회에서 1726년 "선임"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Deutsche Gesellschaft''라는 이름으로 학회를 재편성했다.[4]

1730년에 모교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734년부터 문학과 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문예 일반, 특히 연극(극단) 개혁, 독일어 개량에 힘을 썼으며, 한때는 문단의 대본산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았다.

아내 루이제 아델군데 빅토리에 고트셰트(Luise Adelgunde Victorie Gottsched)는 직접 희곡을 쓰며 좋은 협력자였다. 여배우 프리데리케 캐롤리네 노이베르(Friederike Caroline Neuber)도 처음에는 그와 친하게 지냈지만, 후에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2. 3. 학회 활동

그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최초의 학회인 올뮈츠(올로모우츠)의 지상의 알려지지 않은 학자회 통신 회원이었다.[4] 이 학회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최초의 과학 학술지를 발간하였고, 고트셰트는 이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4]

2. 4. 말년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는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크리스티안 볼프의 제자였다. 마르틴 오피츠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학의 출발점에 섰다고 평가받지만, 명예욕이 강하고 교육자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여 1730년에 모교인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가 되었다. 1734년부터는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강의하는 한편, 문예 일반, 특히 연극(극단) 개혁과 독일어 개량에 힘썼으며, 한때는 문단의 대본산으로 인정받았다.

3. 작품 및 세계관

고트셰트는 1730년 《비판적 시학의 시도 - 혹은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작법 시론(Versuch einer critischen Dichtkunst vor die Deutschen)》을 저술하여 작시법을 제시하고, 예술에서 감정과 감각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이 책으로 1727년부터 1740년경까지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약 20년 동안 문단을 독재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는 문학을 도덕적 교화의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청년 시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공화주의 사상을 담은 비극 《죽어가는 카토》(1732)와 《아기스》(1745), 《파리의 성 바돌로매의 밤》(1745), 《독일연극집(1740, 1745) 등을 통해 교육자적 측면을 드러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영국의 도덕 주간지 The Tatler영어(1709년 이후)와 The Spectator영어(1711년 이후) 등을 모방한 Der Vernünftlerde를 발표하여 저널리즘 특유의 문체를 발전시켰다. 또한, 시민 교양을 높이기 위해 두 개의 연속간행물 Die vernünftigen Tadlerinnende(1725/26)과 Biedermannde(1727/29)을 발행하여 새로운 장르 개척에 힘썼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올바른 문체의 원칙이며 원천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당시 문학은 그에게 학습의 대상이었다. 그의 《비판적 시학의 시도》는 바로크 양식에서 벗어나 모든 불가사의한 것과 있을 수 없는 것을 거부하는 문학론을 제시했다.

그는 모범적인 마이센 언어에 토대를 둔 《독일 문체론》(Sprachkunst, 1748)을 저술하여 순수한 독일어 교본으로 사용되었으며, 남북 통일의 공통 표준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문학사적,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인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 독일 극장》(6권.1740)을 통해 프랑스 고전극의 엄격한 법칙을 받아들여 삼일치(三一致)의 법칙을 제창하고 진지한 연극의 확립을 주장했다. 배우에게 각본 존중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요구하고, 프랑스극 번역ㆍ상연이 유행하던 당시 오페라를 배격하고 어릿광대를 무대에서 추방하려 했다. 그의 비극 《죽어가는 카토》(1732)도 이러한 노력에 힘을 실었다. 《독일 어법의 기초》(1748)를 통해 국어 개량에 공헌했으며, 부인 루이제(Luise, 1713∼1762)와 함께 문예잡지를 발간하고, 여배우 노이버(Neuber, 1697∼1760)와 함께 연극 개량에 힘쓴 업적은 칭찬받을 만하다.

''Gedichte''


고트셰트의 주요 작품으로는 보일뢰의 관점에서 시의 예술에 대한 독일어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인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예술에 대한 시도》(1730)가 있다. 그의 《상세한 연설술》(Ausführliche Redekunst, 1728)과 《독일어 예술의 기초》(1748)는 독일어 문체 발전과 언어 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의 비극과 같은 주제의 프랑스 희곡을 각색한 《죽어가는 카토》(1732)는 오랫동안 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다. 《독일 무대》(6권, 1740-45)는 주로 프랑스어 번역 작품[4]을 담고 있지만, 자신과 아내 등이 쓴 작품도 포함되어 독일 무대에 고전적인 레퍼토리를 제공했다.[2] 그의 독일 희곡 서지인 《독일 희곡 예술사에 필요한 자료》(1757-65)는 이전의 모든 독일 희곡에 대한 설명을 담으려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다.[2] 그는 문학 비평 전문 저널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바흐의 두 개의 세속 칸타타(세속 칸타타 목록)의 가사를 썼다. "여왕이시여, 한 줄기 빛을 더 허락하소서" (BWV 198) 와 "환영하라!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이여" (BWV Anh. 13, 악보는 분실됨).

'''주요 작품 목록'''

제목출판 연도비고
비판적 시가론 (Versuch einer kritischen Dichtkunst)1730년
독일어, 시, 수사학의 비판적 역사에 대한 기고 (Beiträge zur kritischen Historie der deutschen Sprache, Poesie und Beredsamkeit)1732~1744년
독일어 문예론 (Deutsche Sprachkunst)1748년
독일 희곡 문학사에 필요한 자료 (Nötiger Vorrat zur Geschichte der deutschen dramatischen Dichtkunst)1757~1765년
비극 「죽어가는 카토」 (Der sterbende Cato)1732년
희곡집 「독일 무대」 (Deutsche Schaubühne)1740~1745년


3. 1. 비판적 시학의 시도

1730년에 고트셰트는 《비판적 시학의 시도 - 혹은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작법 시론(Versuch einer critischen Dichtkunst vor die Deutschen)을 저술했다. 이 책은 작시 지도서로, 프랑스 시인을 모범으로 삼고 예술에서 감정과 감각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이 책으로 1727년부터 1740년 경까지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약 20년 동안 당시 문단을 독재적으로 지배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문학상의 법칙을 수립하려 했으나, 극단적인 합리주의에 빠져 문학을 도덕적 교화의 도구로 간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를 중심으로 한 많은 스위스 청년 시인들이 그를 공격했다.

고트셰트의 주요 작품은 보일뢰(Nicolas Boileau-Despréaux)의 관점에서 시의 예술에 대한 독일어로 된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인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예술에 대한 시도(Versuch einer kritischen Dichtkunst für die Deutschen, 1730)이다.[2]

3. 2. 연극 개혁

고트셰트는 1730년에 《비판적 시학의 시도 - 혹은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작법 시론》을 저술하여 작시법을 제시하고, 예술에서 감정과 감각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 책으로 1727년부터 1740년경까지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약 20년 동안 문단을 독재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는 문학을 도덕적 교화의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보드머와 브라이팅거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청년 시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공화주의 사상을 담은 비극 《죽어가는 카토》(1732)와 《아기스》(1745), 《파리의 성 바돌로매의 밤》(1745), 《독일연극집》(1740, 1745) 등을 통해 교육자적 측면을 드러냈다. 주간지 『합리적인 비평가들』(1725-26)과 『성실한 시민』(1727)의 편집자였던 고트셰트는 독일 문학이 프랑스 고전주의의 법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분 규칙(Ständeklausel)과 같은 극작가가 따라야 하는 규칙을 발표하고 진지한 무대에서 허풍과 광대극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단일법(dramatic unities) 준수를 강조했다.

독일 희곡 개혁을 위해 고트셰트는 아내 루이제와 극장 매니저 요한 노이베르, 그의 아내 캐롤라인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오페라 공연 대신 프랑스 희곡 번역과 독창적인 희곡을 공연하고, 한스부르스트의 저속한 광대극을 없애 독일 무대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트셰트는 비판을 과도하게 하여 클롭슈토크(Klopstock)와 레싱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다. 1740년에는 시적 상상력이 인위적인 규칙에 의해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스위스 작가 요한 야코프 보드머(Johann Jakob Bodmer)와 요한 야코프 브라이팅거(Johann Jakob Breitinger)와 갈등을 빚었다. 고트셰트는 시는 규칙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지만, 라이프치히와 취리히(Zürich) 사이의 논쟁에서 패배했다.

1741년 그는 캐롤라인 노이베르와 불화를 겪었고, 아내와도 대립했다. 그의 영향력은 빠르게 감소했고, 죽기 전에 그의 이름은 독단적인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었다.

3. 3. 독일어 문체론

고트셰트는 보일뢰(Nicolas Boileau-Despréaux)의 관점에서 시의 예술에 대한 독일어로 된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인 『독일인을 위한 비평적 시예술에 대한 시도』(Versuch einer kritischen Dichtkunst für die Deutschen, 1730)를 저술했다.[4] 그의 『상세한 연설술』(Ausführliche Redekunst, 1728)과 『독일어 예술의 기초』(Grundlegung einer deutschen Sprachkunst, 1748)는 독일어 문체의 발전과 언어 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3. 4. 저널리즘 활동

고트셰트는 영국의 도덕 주간지 The Tatler영어(1709년 이후)와 The Spectator영어(1711년 이후) 등을 모방한 Der Vernünftlerde를 발표하여 저널리즘 특유의 문체를 발전시켰다.[1] 또한, 시민 교양을 높이기 위해 두 개의 연속간행물 Die vernünftigen Tadlerinnende(1725/26)과 Biedermannde(1727/29)을 발행하였다. 그는 주간지 『합리적인 비평가들』(1725-26)과 『성실한 시민』(1727)의 편집자로서 끊임없는 비평 활동을 했으며,[1] 문학 비평 전문 저널의 편집자이기도 했다.[4]

4. 레싱과의 비교

레싱고트셰트의 견해를 반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레싱은 프랑스 고전 작가의 모범을 따른 고트셰트의 견해를 배척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추천했다.[1]

4. 1. 삼일치 법칙 비판

고트셰트는 계몽주의 시대의 극작가 레싱과 자주 비교되는데, 레싱은 고트셰트의 견해에 반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레싱은 프랑스 고전 작가를 모범으로 삼은 고트셰트의 견해를 배척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추천했다.[1] 레싱은 고트셰트가 주장한 드라마 이론에서의 삼일치 법칙 엄수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신분 제한을 극복하여 진정한 의미의 시민이 중심이 된 계몽주의 문학을 이끌었다.

레싱은 고트셰트가 독일의 사고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무대 예술인 드라마를 프랑스적인 틀에 억지로 맞추려 했다고 비판했다. 이는 졸렬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1] 레싱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와 함께 혁명적인 시민 미학의 대표자로서 극장 무대를 “유용과 교술 (prodesse et docere)”의 장으로 규정하며 계몽주의 특유의 교술적 효과를 강조했다.[1] 고트셰트가 교술 목적을 문학의 본질로 강조한 것은 현학적인 반면, 레싱은 교술적 효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문학의 자연스러운 발생 현상으로 이해했다. 레싱이 연극의 오락성을 교술성과 동일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은 연극을 사회 현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즉, 연극을 통해 관중의 인간성을 발전시켜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레싱 이후 독일 연극에서는 속박을 벗어난 시민 스스로가 연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고트셰트와 오피츠비극을 통해 사회적으로 탁월한 영웅들을 다루어야 하고, 희극에서만 시민 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싱은 이러한 생각을 무너뜨리고, 작가가 시민 생활에서도 비극에서 다룰 수 있는 비극적 갈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아 시민 생활에 어필했다는 점에서 고트셰트와 차이를 보인다.

고트셰트는 독일 문학이 프랑스 고전주의의 법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 그는 극작가가 따라야 하는 규칙(예: 신분 규칙(Ständeklausel))을 발표하고 진지한 무대에서 허풍과 광대극을 없애 버렸다.[4] 그는 3단일법 준수를 주장했다.

결국 고트셰트는 비판에서 너무 멀리 나아갔다. 그는 클롭슈토크와 레싱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다.[2] 1740년, 그는 요한 야코프 보드머와 요한 야코프 브라이팅거와 갈등을 빚었다.[4]

4. 2. 시민 비극 옹호

고트셰트는 비극을 통해서는 사회적으로 뛰어난 영웅들을 다루어야 하고, 희극에서만 시민 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싱은 이러한 생각을 무너뜨리고, 작가가 시민 생활에서도 비극에서 다룰 수 있는 비극적 갈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아 시민 생활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고트셰트와 차이를 보인다.[1] 레싱은 고트셰트가 주장한 드라마 이론에서 삼일치 법칙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신분 제한을 극복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이 중심이 된 계몽주의 문학을 이끌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초상화, 안나 로지나 데 가스크(Anna Rosina de Gasc) 1767/68년 작, 독일 할버슈타트 글라임하우스 박물관 소장


레싱은 고트셰트가 독일의 사고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대예술인 드라마를 프랑스적인 틀에 강제로 맞추려 했으며, 그것은 졸렬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레싱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와 함께 혁명적인 시민 미학의 대표자로서 극장 무대를 “유용과 교술 (prodesse et docere)”의 장이라고 정의하면서 계몽주의 특유의 교술적 효과를 강조했다. 고트셰트가 교술 목적을 문학의 본질로 강조하는 것이 현학적인 데 비해, 레싱은 교술적 효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문학의 자연스러운 발생 현상으로 이해했다. 레싱이 연극의 오락성을 교술성과 같은 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은 연극을 사회 현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연극을 통해 관객의 인간성을 발전시킴으로써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 것이다.

4. 3. 교술적 효과에 대한 관점 차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고트셰트가 주장한 드라마 이론에서의 삼 일치 엄수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신분 제한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이 위주가 된 계몽주의 문학을 주도했다.[1] 레싱은 고트셰트가 독일의 사고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프랑스적인 틀에 드라마를 맞추려 했다고 비판했다.

레싱은 드니 디드로와 함께 극장 무대를 “유용과 교술 (prodesse et docere)”의 장이라 규정하며 교술적 효과를 강조했다. 고트셰트가 교술목적을 문학의 본질로 강조하는 것이 현학적인데 비해 레싱은 교술적 효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문학의 자연스러운 발생 현상으로 이해했다. 레싱은 연극의 오락성을 교술성과 동일선상에서 해석했는데, 이는 연극을 사회현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즉, 연극을 통해 관중의 인간성을 발전시킴으로써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레싱 이후 독일 연극에서는 속박을 벗어난 시민 스스로가 연극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고트셰트와 오피츠비극을 통해서는 사회적으로 탁월한 영웅들을 다루어야 하고, 희극에서만 시민 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묘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싱은 이런 생각을 무너뜨리고, 작가가 시민 생활에서도 비극에서 다룰 수 있는 비극적 갈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고 시민 생활에 어필했다는 데서 고트셰트와 차이점을 가진다.

5. 문학사적 의의

고트셰트는 독일 문학사의 한 단계를 장식한 과도기적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당시 독일 문학계에 만연했던 바로크풍의 과장된 경향에 맞서, 연극, 문학, 언어 등 다방면에서 혁신을 추구했다.[1] 특히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문학을 추구했으며, 이는 당시 독일 문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고트셰트는 문학의 혁신이 독일 전체의 영예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1] 그러나 당시 독일 문학은 이렇다 할 전통이 없었기에, 프랑스의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니콜라 부아로데프레오 등을 모범으로 삼아 독일 문학의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은 요한 야콥 보드머, 요한 야콥 브라이팅어 등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보드머와 브라이팅어는 존 밀턴으로 대표되는 영국 문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트셰트의 프랑스 중심주의를 비판했다. 이 논쟁 이후 고트셰트의 명성은 실추되었고, 그의 이름은 학식을 과시하는 어리석은 인물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5. 1. 긍정적 평가

그는 요한 야콥 보드머와 요한 야콥 브라이팅어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교조주의라는 비판 이면에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담겨 있었다.[1]

그는 영국의 도덕 주간지 <The Tatler영어(1709년 이후)>와 <The Spectator영어>(1711 이후) 등을 모방하여 (처음에는 함부르크에서 발표한) <Der Vernünftlerde>를 발표하고, 저널리즘 특유의 문체를 발전시켰다. 시민 교양을 높이기 위해 <Die vernünftigen Tadlerinnende>(1725/26)과 <Biedermannde>(1727/29)을 발행하여 문학적, 작가로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1]

당시 문학은 그에게 학습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올바른 문체의 원칙이며 원천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의 <비판적 시학의 시도>가 완성되었다. 여기서 바로크 양식에서 벗어나 모든 불가사의한 것과 있을 수 없는 것을 거부하는 문학론이 나왔다.[1]

그는 모범적인 마이센 언어에 기초한 <Deutsche Sprachkunstde>(1748)를 저술했는데, 이는 순수한 독일어 교본으로서 영향력이 커서 남북 통일의 공통 표준어 육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문학사적,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고트셰트의 영향력이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1]

<Die Deutsche Schaubühne nach den Regeln der alten Griechen und Römer eingerichtetde>(6권.1740)에서 프랑스 고전극의 엄격한 법칙을 받아들여 삼일치(三一致)의 법칙을 제창하고 진지한 연극의 확립을 주장했다. 배우에게 각본 존중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요구하고, 프랑스극을 번역ㆍ상연하던 당시 유행의 오페라를 배격하고, 어릿광대를 무대에서 추방하려 했다. 그의 비극 <Der sterbende Catode>(1732)도 큰 힘이 되었다. <Grundlegung einer Deutschen Sprachkunstde>(1748)로 남북 표준어 육성과 국어 개량에 공헌했으며, 재능 있는 부인 루이제 아델군데 빅토리에 고트셰트(1713∼1762)와 함께 문예잡지를 발간하고, 여배우 프리데리케 카롤리네 노이베르(1697∼1760)와 함께 연극 개량에 힘쓴 업적은 칭찬받을 만하다.[1]

고트셰트는 독일 문학사에 있어 한 단계를 장식한 과도기적 작가 중 중요한 인물이다.[1]

고트프리트 레싱이 고트셰트보다 연극적 범위를 넓히고 그의 한계점을 지적하여 문학사적으로 발전을 가져왔지만, 고트셰트 또한 단순 모방이 아닌, 당시에는 없던 예술의 역할을 그의 저서 <비판적 시학의 시도>와 연극 개혁 시도를 통해 강조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과도기적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고트셰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진다.[1]

쾨니히스베르크(프로이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작센 공국으로 이주하여 1734년부터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학 및 철학 교수로 재직하며 프랑스의 합리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철학에서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크리스티안 뵐프의 계보를 잇는다. 당시 바로크풍의 왜곡되고 과장된 경향에 맞서 독일 연극, 문학, 언어의 혁신을 추구했다. 고트셰트는 "문학의 혁신은 전 독일의 공동의 영예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독일 문학은 무시해도 될 만한 전통밖에 없었기에 프랑스의 피에르 코르네유장 라신, 그리고 시학에서는 니콜라 부아로데프레오를 '좋은 취향'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극장이 정통 루터파에게는 악마의 설교단이나 다름없던 시대에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의 지위와 공연 내용 향상, 더 나아가 현대 표준어의 순화와 보급에 공헌했다.[1]

5. 2. 부정적 평가

1740년경까지 고트셰트는 높은 명성을 누렸으나, 취리히 대학교 교수 요한 야코프 보트머 및 브라이팅거와의 논쟁 이후, 그의 이름은 학식을 과시하는 어리석은 자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어 경멸받게 되었다. 요한 야코프 보트머와 브라이팅거는 영국의 존 밀턴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고트셰트는 프랑스의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그리고 시학의 니콜라 부아로데플레오를 '좋은 취향'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6. 가족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루이제 쿨무스는 저명한 작가였다. 그녀는 1762년에 사망했다. 3년간의 상례 기간 후, 1765년 캄부르크(Camburg), 잘레(Saale)에서 고트셰트는 19세의 두 번째 아내인 에르네스티네 수잔네 카타리나 노이네스(Ernestine Susanne Katharina Neunes, 1746–1811)와 결혼했다.

참조

[1] 간행물
[2] 백과사전
[3] 서적 Encyclopedia of German Literatur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2-12-10
[4]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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